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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0]현충원 산책길
작성일시: 2014-01-16 10:32:04   
작성자 : 박명수(고16)   

1 현충원 산책길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여기저기에서 겨울잠을 깨고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린다.
매년 찾아오는 봄이건만 맞이하는 나는 해마다 감회가 다르다.
작년에 맞이했던 봄은 내 개인적인 삶에 대한 오만가지 잡념으로 괴로웠는데 금년 봄은 신문과 방송이 세계경제불안과 국내 기업의 어려움을 연일 크게 보도하고 있어 내 마음도 덩달아 들떠서 스산한 느낌이다.
몇 해 전부터 집 뒤의 국립 현충원이 뒷문을 개방한 것을 계기로 아침마다 현충원 산책길을 한 바퀴씩 돌고 있다.

현충원에 들어가는 문은 정문을 포함하여 5개가 있다.
흑석동, 상도동, 사당동에서 들어가는 뒷문이 3개 있고 동작대로에서 들어가는 정문과 지하철 4호선 동작역에서 내려 동작대로를 따라가면 정문 가기 전에 들어가는 문이 하나 더 있다.
산책길 중 뒷문에서 들어가면 산 중턱을 은행나무 가로수 길로 만들어 현충원 경내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게 되어 숲속을 걷는 느낌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묘소는 상도동과 사당동 뒷문에서 내려가 산책길을 걷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존경하는 *서재필 박사(갑신정변 주역의 한사람으로 박사의 기념비가 미국의 필라델피아의 공원에 서 있고, 그 곳에는 기념관도 있으며 그 곳은 김대중 대통령도 방문한 적이 있으며 ‘독립신문’의 사본도 보관되어 있음)는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데, 그 곳은 흑석동 뒷문에서 들어가면 가깝다.
정문으로는 차량을 이용할 수 있고, 정문 옆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현충지 연못이 나오고 봄이 되면 연못 주위로 개나리와 철죽이 장관을 이룬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지만, 백미는 장군묘역에 올라 서울을 한 눈에 바라보는 것이다.
한강이 눈 아래 내려다보이고, 남산이 보이고, 아차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쾌청한 날이면 멀리 북한산도 또렷이 보인다.
강남의 신도시도 한 눈에 들어온다. 풍수를 모르더라도 전망이 좋아 국립 묘역답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제주도의 올레 길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걷기 운동이 많이 보급되었고 서울에서도 북한산, 관악산 둘레길 등 잘 닦여진 길이 많아 걷는 사람도 부쩍 늘었지만 현충원 산책길은 더 오래전에 개방되어 인근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고객 한분이 오셔서 아침마다 부부 동반으로 현충원 길을 산책하신다 하여 무척 부러웠던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내가 그 길을 걷게 되었다.

조용한 길을 혼자 산책하고 있으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의 한 인물이 떠오르기도 하고, 중고등 학교 때 이해도 못하고 읽었던 소설의 한 대목이 갑자기 회상되고, 청년시절에 혼자서 고민하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중첩되어 떠올라 생각이 뒤얽히기도 한다.
똑 같은 글을 읽고도 오래 전과 지금의 생각이 다르다.
누군가 얘기한대로 청년기와 장년기 노년기의 독서는 다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한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잠깐 소개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 한다”고 소개된 글을 보고 정음사에서 출판된 <파우스트>에 도전 했다가 그 내용을 다 알지도 못하고 끝내고 만 적이 있었다.
대학시절 특별히 초빙된 안병욱 교수에게서 강의를 듣고서야 그 소설의 주제가 “인간은
스스로 자기 삶에 만족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놓고 불가하다는 신과 가능하다는 악마의 대결로 시작되어 “어떤 향락과 성취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천변만화 하더니, 보잘 것 없고 위험이 따르는 개척민들 속에서 자유도 빵도 스스로 해결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순간에 만족하다니.” 라는 악마의 고백으로 막이 내리나, 영혼은 여인의 도움으로 악마로부터 구원 받아 천상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대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그의 저서<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남이 지적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잘못을 그 누구도 스스로 터득하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을 가르쳐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보험회사에서 증권분석사로 일하다가, 은행의 경제 분석가인, 시니어 파트너 3인의 수석 비서관으로 옮긴 후의 일을 쓰고 있다.
3인중 2명의 젊은 시니어로 부터는 극찬을 받았는데, 파트너 중 한명인 그 은행 창업자이기도 한, 70대의 노인에게 불러가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자네가 이 회사에 입사할 때 난 자네를 눈여겨보지 않았네.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네.
그런데 자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군. 그 뿐만 아니라 자네는 보통 이상으로 어리석군. 나는 자네가 보험회사의 증권 분석가로서는 일을 썩 잘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만약 자네가 증권 분석 업무를 계속하길 바랐다면 우리는 자네를 이리로 데려오지 않고 원래 있던 그 자리에 그냥 두었겠지. 그런데 지금 자네는 옛날 하던 것처럼 일하고 있더군. 지금 자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다시 말해 자네의 새로운 직무에서 효과적인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질책을 듣고 처음에는 대단히 화가 났지만 내심 그 노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새로운 일을 맡은 지금 내가 효과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를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습관이나 생각에 충격적인 질타를 당하면 분노하여 그 사람과 싸우거나, 반대로 깨달아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선하는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후자의 성향이 많고, 나이가 든 사람은 전자의 성향이 많은 것 같다.

나는 피터의 글을 읽고 기회가 있을 때 자녀들에게 강조했다.
너희들이 아직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지금 내가 들려주면 너희는 그 생각을 지금부터는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엉뚱한 생각이라도 새로운 생각을 들려주려고 애써왔고, 또 생각나는 것들을 주저 없이 편지로 썼던 것이다.
자신의 장·단점도 누군가에게서 지적 받지 않으면 스스로 깨우치기 어려운데 그런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더욱이 그 지적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거부 반응이 적으니, 누군가 너희들에게 지적한 잘못에 대하여 반발하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더불어 새로운 착상이나 다양한 사고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도 교제하여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소시 적에 위인전을 읽을 때는 몰랐던 위인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지금 읽는 책들의 의미는 옛날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출세욕이 강한 줄리앙이 레날 시장 부인의 침실에 숨어들던 대목만 생각나던 젊었을 때 읽었던 “적과 흑”을 다시 읽어보면서 젊은 날의 독서와 지금 읽는 감회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정욕과 출세의 욕망이 시든 이 나이에 독서를 하는 것은 앞서 얘기한 독서의 깊이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세상일을 평온한 상태로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독서는 높은 산에 올라서 세상을 관망하는 자세로 글을 읽게 된다.

문학이나 철학서적도 지금의 독서에는 정열적이고 지식을 보태는 내용보다는 관조의 내용이 더 흥미롭고 감명을 준다.
극렬한 대립적인 말 보다는 화합의 얘기에 더 많이 귀 기울어진다.
젊은이의 불만에 대한 기성세대의 논조에 대하여도 반박보다는 조용하게 설득하고 달래고 양보하는 말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젊은 날의 투쟁적이고, 반항적이고, 격렬하게 타오르던 불만들이, 다 녹아버린 지금은 그들에게 격하게 대하는 것보다는 조용하게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처음 내가 현충원을 산책할 때는 나이든 몇몇 사람만이 눈에 띄었으나 요즈음은 젊은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있다.
건강관리에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구나 생각 하면서도 혹시나 젊은 사람들이 실직하여 아침 일찍 산책에 나섰나 하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편치 않다.
IMF 구제 금융을 받는 문제로 온 나라가 큰 상처를 입은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사태로 야기된 금융문제가 또 한 번 우리 사회를 강타하여 실업자가 양산되고,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의 일자리가 부족하여 온 나라가 이를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서 많이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해결하고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만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기에 바쁜 개인들의 ‘빨리 빨리’ 삶의 전형이, 나라 살림에서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동안 우리 세대들의 삶이야 워낙 어려웠던 ‘보릿고개’라 불리는 빈곤을 극복하느라 장래 계획이고 뭐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OECD에도 가입하여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데, 정부마저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 기관의 어디에서는 아무리 오늘이 어렵더라도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국가 앞날에 대한 장기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정권의 초기에는 거창한 계획이 발표 되었다가는 정권이 끝날 때에는 온갖 불미스러운 스캔들만 남긴 채, 벌써 몇 대 째 정권이 마무리 되고 있다.
발전하고 있다기보다는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제자리걸음 만 하고 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던 선열들이며, 육이오 전쟁으로 희생을 치른 영령들이 오늘날의 우리 현실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생각에 잠겨 걷다보면 그래도 겨우내 엉성한 가지만 남아서 죽은 듯 서 있던 나무는 조금씩 푸르름을 머금었고 봄의 전령사인 개나리는 벌써 꽃망울을 내 보인다.
작년 같이 추웠던 겨울에도 자연은 묵묵히 올봄의 준비를 다 하였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사회에 비하면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늙어서 단순하게 생명만 오래 유지하는 것이 복이 아니고 목표를 세워 이룰 때,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해 오고 있지만 은퇴 후 10여년이 훌쩍 지나갔다.
허송세월로 수명만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오히려 불안하다.
생각은 앞서지만 당장 무엇을 할까 생각하면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복잡해진다.
“생각이 복잡하고 말이 많으면 진리와는 멀어 진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복잡한 생각은 다 버리고 남은 시간이라도 단순하게 살아보자고 다짐도 해 본다.

루소는 “나는 내가 보아온 과거의 그 누구와도 같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그 누구와도 같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 한다.
훌륭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다른 삶들과는 다르다. 자연이 부어넣은 거푸집이 깨어져 버린 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는 내가 쓴 것을 다 읽지 않은 후가 아니면 판단하지 못하리라.”고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참회록>에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누구에게나 유일한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의 삶 자체는 의미 있는 것이고, 자신의 삶에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선열들이 잠들고 계신 고요한 현충원의 새벽을 혼자 걸으면서 떠올려보는 상념이다.

(2010년 어느 봄날에)
* <갑신정변과 서재필>은 내 블로그(mspark4835.blog.me)에서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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